정유업계 “시장 논리 어긋나”
규제개혁위 심의서 결론 못내
서울 서대문구의 한 주유소에서 차량들이 주유를 하고 있는 가운데 입구에 유류가격표가 보이고 있다. [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김은희 기자] 정부가 휘발유 도매가격을 확대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정유업계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는 ‘깜깜이’ 기름값 안정화를 위해 가격을 공개해 기업 간 경쟁을 촉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정유업계는 시장경제 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발하고 있다. 팽팽한 양측 논리에 국무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도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국무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 경제1분과위원회는 지난 24일 회의에서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진하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시행령’ 개정안을 심의했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개정안이 관련 업계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다음달 10일 다시 심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심의위원은 “논의를 진행했지만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며 “이해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고 전했다.
개정안은 정유사가 대리점과 주유소에 공급하는 휘발유·경유 등의 가격을 지역별로 구분해 공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도매가격이 세밀하게 공개되면 시장 경쟁이 발생해 정규 가격 안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정유사와 주유소 간 거래는 통상 사후 가격 정산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주유소 입장에선 정확한 가격을 모른 채 정유를 공급받아 판매하고 있다고 봤다. 불투명한 가격 구조로 유류세 인하분이 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등의 부작용으로 이어진다는 게 산업부의 주장이다.
정유업계는 기업의 경영활동을 저해하는 과도한 규제라고 반발한다. 개별 기업의 영업비밀을 정부가 나서서 공개하는 꼴이라는 지적이다. 정부의 취지와 달리 경쟁사의 가격정책을 분석할 수 있게 되면서 가격 상향 동조화나 공동행위(담합)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촉진하겠다던 시장 경쟁이 오히려 제한되는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사후정산은 구매자인 주유소가 구매 경쟁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요구해 시행하는 사안”이라며 “개별 정유사의 가격정보를 공개한 사례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고 개별 주유소 소매가격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현행 제도도 다른 나라에 비해선 매우 까다로운 규제”라고 말했다.
유류세 인하분 반영과 관련해선 정유사의 경우 즉각 공급가에 반영했다고 해명했다. 다만 전체 주유소의 90% 이상이 직영이 아닌 자영 사업장이기에 이들이 보유한 유류세 인하 전 재고까지 인하분을 반영하라는 주문은 재산권 침해라고 꼬집었다.
유류 도매가격 공개는 지난 2009년에도 추진됐지만 2년여간 총리실 규개위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하다가 영업비밀 침해 등을 이유로 최종 철회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당시 규개위가 더 이상 논의하지 않은 것은 가격이 상향 동조화된다는 연구용역 결과가 나왔고 시장경제 원칙에 위배된다고 봤기 때문”이라며 “일관성 있는 정책 결정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다만 이번에는 정부도 굳건한 추진 의지를 보이고 있어 12년 전과는 상이한 판단이 내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산업부는 4개 정유사가 과점하는 정유시장 구조상 공정한 상호 경쟁을 위해선 가격을 공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산업부 측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어진 고유가에 국민 어려움이 크고 일각에선 유류세 인하분이 정유업계 마진으로 흡수됐다는 주장이 제기된다”며 “석유가격 안정화를 도모하고 국민의 편익을 개선하기 위해선 석유 가격 공개 범위를 확대해 시장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ehki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