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노조 측이 지난 16일 대법 앞에서 통상임금 판결에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대법은 이날 노조 승소 취지로 판결했다. [연합] |
[헤럴드경제=서경원 기자] 지난 16일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 소급분에 포함해 지급해야 하는지를 놓고 현대중공업 노사가 9년 동안 벌인 소송전이 노동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대법원은 이날 “기업이 일시적 경영상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사용자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경영 예측을 했다면 그러한 경영상태의 악화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며 “향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들어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처럼 이번 재판에서 대법원이 현대중공업 측의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최종 판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2013년 자동차 부품업체 갑을오토텍 노동자 소송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 기업들의 통상임금 소송은 신의칙의 인정 여부가 관건이 돼오고 있다.
신의성실(信義誠實)의 원칙이란 말 그대로 법률 행위를 할 때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행동해야 하며 상대방의 신뢰를 저버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권리 행사나 의무 이행은 상대방을 배려해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내용·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민법 제2조(신의성실)에 반영된 우리 민법의 기본 대원칙이다. 단순한 법 조항이 아니라 개인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 관계를 규정하는 근대 사법(私法) 전반의 대원칙인 법적 규범이다.
한 마디로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해결해야 할 선이자 룰’이다. 서로 간에 지키거나 감수해야 할 공평한 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종의 ‘국민의 법감정’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형법 등 국가와의 관계 등 공적인 규율을 정한 공법(公法)의 경우 누가 옳은지 그른지, 맞고 틀리는지를 법규에 근거해 엄격하게 가리게 된다.
이와 달리 개인 간의 사적 영역은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할 때 양쪽의 의견이 맞지 않거나 서로 다툴 때 가장 공평한 방법으로 조화롭게 해결하기 위한 ‘게임의 룰’,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는 한계선’이 바로 신의칙인 셈이다.
민법 2조에 이 내용이 규정된 것도 민법 조문에 다른 내용이 없으면 신의칙에 의해 해결하라는 취지다. 실정법에 따로 규정이 없으면 이런 원칙에 따라 사정을 잘 헤아려봐서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신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이익을 나눌 수 있도록 해결하게 된다. 기본법인 민법을 토대로 파생된 특별법인 상법, 절차법인 민사소송법도 모두 근저에 이런 이념이 흐르고 있으며 분쟁이 났을 때 별도의 규정이 없으면 이 원칙이 적용된다.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은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편에서 적용된다. 노동자의 합당한 권리도 회사의 경영 상황과 재무 여력 한계를 감안한 조건 하에 요구돼야 한단 차원에서다. 이번 현대중공업의 통상임금 판결 결과는 최근 해외 수주가 증가하면서 조선업 경기가 회복되고 있는 점 등에 따라 신의칙의 법적용이 비교적 엄격히 이뤄지지 않은 데 따른 것이란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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