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건비 부담으로 투자·고용 감소 우려
현대중공업 노조 측이 16일 대법원 앞에서 통상임금 판결에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문영규·김지헌 기자]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소송에서 대법원이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인정하지 않고 근로자측 손을 들어주면서 올해(3분기말) 3200억원 이상 적자인 회사 경영에도 부담이 커졌다. 경기회복 등을 근거로 내려진 법원의 판단에 재계는 ‘신의칙’ 적용의 모호성과 기업경영의 불확실성 증대, 고용 감소 등을 우려하며 구체적인 지침 마련도 촉구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16일 현대중공업 근로자 A씨 등 10명이 한국조선해양(전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회사가 근로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금액은 63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은 “경영상태의 악화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고 향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신의칙을 들어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면서 신의칙을 엄정히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신의칙이란 모든 사회 구성원은 상대방의 신뢰에 반하지 않도록 성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민법상 대원칙이다. 대법원은 경영상 큰 어려움이 있거나 기업 존립이 어렵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근로자들의 통상임금 재산정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고 판결한 바 있다. 통상임금 재산정 및 법정수당 추가 지급 소송에서 중요한 근거가 되는 기준이다.
대법원은 “추가 법정수당 및 이를 반영한 추가 퇴직금의 지급으로 피고에게 중대한 경영상 위기가 초래된다거나 기업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조선업 경기가 되살아나며 현대중공업도 호황기 수준의 수주 실적을 내고 있어 존립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 근거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올 3분기 3296억원의 누적 영업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추세를 봐도 2019년 1295억원, 지난해 325억원으로 급감하는 중이다. 3000억원의 적자에 6000억원의 부담이 가중된다면 대규모 수주에도 단기 실적은 ‘경영위기’ 수준에 이를 수도 있다.
이번 소송을 포함한 다수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이 부정되면서 재계는 호황에도 웃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경기가 좋지 않을 경우 신의칙이 인정될 수 있지만 경기 개선 시점에는 저조한 실적에 대규모 손실이 가중되는 이중고를 겪을 수 있다.
업계는 경영상 어려움과 함께 기업의 존립 가능성에 대한 법원의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고 호소하며 구체적인 지침 마련과 관련 입법 등을 요구했다.
이번 소송 결과에 대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제연구원은 논평을 통해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은 금번 판결로 예측치 못한 인건비 부담이 급증해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이라며 “현대중공업은 기업경영이 매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금번 판결에서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아 통상임금 관련 소모적인 논쟁과 소송이 증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급변하는 경제환경을 기업의 경영자가 예측해 경영 악화를 대응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라면서 “산업 현장에 혼란과 갈등만 초래할 우려가 크다”고 봤다.
통상임금 적용이 확대될 경우 고용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기업의 인건비 부담으로 추가고용을 줄이게 되면 기존 근로자들은 임금이 확대되나 젊은 층을 비롯한 신규 고용은 줄게 된다는 것이다. 2018년 경총 연구에 따르면 추가 법정수당 지급 부담으로 5만5000개의 일자리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법원이 신의칙을 엄격히 적용하면서 기업들의 설비투자 증가율이 감소하고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서 “일자리가 없는 근로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업 경영의 현실을 모르는 판단으로 보인다”며 “이렇게 되면 기업들 입장에서도 임금 체계를 바꿔 결국은 근로자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만 높아지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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